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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초동맹 사쓰마 조슈 앙숙에서 동지로 메이지유신 번벌 정치 시발

삿초동맹

조슈 vs 사쯔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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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와 사쓰마의 동맹 이야기

앙숙에서 동지로: 삿초동맹 이야기

에도 시대 말,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과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조슈는 막부 타도와 천황 중심의 개혁을 주장했고, 사쓰마는 처음엔 막부에 협조하며 조슈를 억누르는 입장이었습니다. 1863년 교토에서의 무력 충돌(금문의 변)과 1864년의 또 다른 대립은 양측의 불신을 극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서양 세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막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조슈와 사쓰마 모두 서양과의 충돌(조슈는 시모노세키 포격, 사쓰마는 가고시마 포격)을 겪으면서, "외세를 몰아내자"는 생각만으론 일본을 지킬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근대화와 군사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번의 이해관계가 맞닿기 시작합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도사의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그는 두 번의 지도자,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를 중재해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합니다. 조슈는 서양 무기를 구할 통로가 필요했고, 사쓰마는 영국과의 무기 거래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쓰마가 조슈에 무기를 공급하고, 두 번이 서로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한 것이 동맹의 핵심이었습니다.

1866년, 막부가 조슈를 다시 공격하려 하자 사쓰마는 조슈를 공개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무기와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덕분에 조슈는 막부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내고, 막부의 권위는 크게 흔들립니다. 이후 1868년 보신전쟁에서 이 동맹의 사무라이들이 신정부군의 주력이 되어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의 문을 엽니다.

역사학자들의 평가와 의미

  • 일본 학계에서는 삿초동맹을 "근대 일본의 출발점", "막부 체제 종식의 결정적 동력"으로 평가합니다. 두 번이 주도한 메이지 정부는 이후 일본의 정치·군사 엘리트를 배출하며, 번벌 정치의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이 동맹이 일본을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게 하고, 스스로 근대국가로 도약할 수 있게 한 계기로 봅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 근대화를 이룬 사례로, "아시아의 예외적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 논쟁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 역할이 과장되었다는 주장, 동맹의 실제 체결 시점이나 배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두 번의 협력이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도, 일본의 급격한 변혁도 불가능했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요약

조슈와 사쓰마의 동맹은 원수였던 두 세력이 일본의 미래를 위해 손을 잡고, 막부를 무너뜨려 근대 일본의 기틀을 세운 극적인 연합이었습니다. 이 동맹은 일본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고,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일본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